파주에서 내비게이션 없이 강남 가기

 

맛이 간 st.

 

 0. 휴대폰이 말썽이다. 사설 액정 교체를 한 게 잘못이었나 보다. 방수가 되는 휴대폰임에도 불구하고 물에 한번 빠지니 얼굴인식도 안되고 혼자 지지직거린다. 더 큰 문제는 화면 한쪽이 화면의 최대 밝기 이상으로 밝아져 배터리 소모가 심해졌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문제가 많아졌다.

 1. 불안하지만 일은 해야 하고, 어쨌든 배터리 소모 외에는 큰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일을 시작했고 처음으로 파주로 가게 되었다. 아침 일찍 출발하느라 비몽사몽 한 상태로 운전을 했고 미처 차량용 충전기를 꽂지 않은 채 1시간 반 정도 운전을 했다.

 2. 도착해서 일을 하던 도중 점심 먹으러 잠깐 차를 몰고 나갈 일이 생겼고 차량에 타서 충전기를 꽂았는데..? 충전이 되지 않는 것이다. 당황했다. 몇 번을 충전기를 뺏다 꼽았다를 반복했지만 여전히 충전표시가 되지 않았고 정황상 휴대폰에 문제가 생긴 것이 확실했다.

 3.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파주가 초행길이었을뿐더러, 나는 운전을 시작한 지 3개월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서울지역에 대해 적응하지 못한 상황에서 50km을 내비게이션 없이 찾아간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렇게 고민하는 순간에도 배터리는 서서히 닳아가고 있었고 결단을 내려야 했다.

 4. 지금 생각해보면 집에서 멀쩡히 충전이 되었던 휴대폰이 차에서는 충전이 되지 않았다면 충전기의 문제를 의심했어야 했지만 당황한 나는 그렇게까지 디테일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같이 일하시던 분께 사정을 설명하고(당연히 엄청나게 욕을 먹은 후) 집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5. 남은 배터리는 약 20%, 당연히 집까지 충전 없이 가기엔 택도 없는 양이였지만 가볼 수 있는데 까지 가보기로 했다. 평일 오후 시간이라 길은 막히지 않았고 꽤 멀리 갈 수 있었다. 약 30km, 절반 이상을 지나 올림픽 대로로 진입한 후 쭉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상황.

 6. 휴대폰이 꺼졌다. 신기한 것은 휴대폰이 꺼지고 난 후 오히려 차분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정말 모든 정보를 표지판을 통해 읽어내야 했고 운전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다. 운전을 하다 보면 간혹 사고가 날 뻔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잘 생각해보면 그럴 때마다 항상 휴대폰을 보고 있었던 것 같다.

 7. 휴대폰이 꺼지기 전, 미리 파악해놓은 대로 '성수대교 남단' 표지판이 보일 때까지 무작정 직진했다. 순탄하던 주행의 마지막 고비, '강남대로'. 어디선가 들어봤던 그 명칭이 나를 헷갈리게 했다. '강남대로'에서 빠져야 하는지, 아니면 '성수대교 남단'이 보일 때까지 계속 달릴 것인지 선택을 해야 했다.

반응형

 8.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내비게이션을 믿기로 했고 그대로 '강남대로' 방면 출구를 지나쳤다. 쭉 지나치고 나서 약 5분 뒤, '성수대교 남단' 표지판이 나타났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무사히 도착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도 한두 번 더 헷갈렸지만 별 탈 없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9. 정말 만감이 교차하는 하루였다. '내비게이션 없이 집까지 운전했다'라는 뿌듯함과, '충전이 되지 않는 것을 몰랐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아찔함, '일을 끝내지 못하고 온 것'에 대한 죄송함 등등. 다양한 감정이 교차하는 와중 더 웃겼던 것은 그 와중에도 '브런치에 쓸 소재가 하나 늘었는데?'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이었다. 

 10. 옛날 가족여행을 갈 때 내비게이션 없이 전국지도를 들고 동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여행을 가던 기억이 난다. 내비게이션이 없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키 포인트만 딱 기억하자. 큰 길만 잘 따라간다면, 작은 길은 어떻게든 이어져있다. 

 11. 이번만큼 내 운전 실력이 크게 성장했다고 느꼈던 적이 잘 없었던 것 같다. 운전할 때 전적으로 내비게이션을 의존하던 내가 혼자서 표지판을 보고 대략적인 길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때까지 내비게이션이 운전하고 내가 보조를 했다면, 이제는 내가 운전을 하고 내비게이션이 보조하는 것으로 진화했다.

 

결국 운전을 하는 것은 '나'이다.

 

12. 인생이라는 도로도 마찬가지이다.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 당황하지 않으려면, 평소에 '내비게이션' 없이 주행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하고. 그러다 보면 정말로 '내비게이션'은 '주행 보조'의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며칠 뒤 확인해보니 충전기의 문제가 맞았다. 화내서 미안해 휴대폰아...*